"더블린 동네 사람들, 일상의 굴곡과 온기"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세 소녀. 모라와 메리와 디어드리는 "결혼이라는 왕관"을, 달콤한 사랑의 유일한 종착역일 그 순간을 함께 꿈꿔왔다. 시간이 흘러 열일곱이 된 친구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웨일스로 더블린으로 흩어졌고, 마을에 남은 메리는 '순종 서약'을 하며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찾은 디어드리와 모라는 "여성해방운동은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식탁에서 버젓이 오가는, 이전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끔찍히 보수적인 가족의 모습을 본다. 더이상 이들에게 결혼은 '왕관'도, 사랑이 의무적으로 도달해야 할 종착역도 아니다.
하지만 웨일스에서 자유로운 삶을 경험하고 모라와 뜻을 함께한 디어드리조차도 "부모에게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하루, 그들을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로 만들어줄 하루를 선물"하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모든 형식에 맞춰 결혼식을 진행하기로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모라는 생각한다. "결혼식이나 의식 같은 것은 사실상 울타리나 자물쇠"나 다름없고 "세상이 지금 이 모양인 건 사람들이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이 의도한 바가 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많은 걸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부모를 위해 인생의 긴 여정 중 '그저 단 하루'만 참아줄 수 없냐는 죄의식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체스트넛 스트리트>는 모라가 살고 있는 더블린의 동네, '체스트넛 스트리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이다. 메이브 빈치의 소설 속에는 거대한 주인공이나 극적인 서사는 없다. 엇나간 가족 관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랑,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며 "인생이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진 않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사람들. 마음에 계속해서 그늘을 드리우는 크고 작은 고민들을 해결할 길은 없지만, 밤이 오고 다시 해가 떠서 당면한 일상을 다시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사연이 그려질 뿐이다. 그 모습과 진솔한 이야기가 꼭 지금, 여기 우리 주변의 모습 같아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 소설 MD 권벼리 (2020.07.10)